리오집사의 기억저장소

숨결이바람될때When Breath Becomes Air - 폴 칼라니티


촉망받는 신경외과 레지던트 의사 폴 칼라니티가 죽음에 직면한 후 기록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삶과 죽음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수 많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던 의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른 나이에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숨결이 바람될 때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오랜만에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은, 소장하고 싶은 책을 만났다.


책 속의 문장

"우리는 어느 날 태어났고, 어느 날 죽을 거요. 같은 날, 같은 순간에. 여자들은 무덤에 걸터앉아 아기를 낳고, 빛은 잠깐 반짝이고, 그러고 나면 다시 밤이 오지." 나는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 옆에 서 있었던 셈이다. 쌍둥이의 삶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물론 당신도 잘 알겠지만, 당신의 삶이 이제 막, 아니,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기나긴 싸움이 될 거예요. 남편분도 잘 들으세요. 서로를 위해 자기 자리를 잘 지켜줘야겠지만 필요할 때는 꼭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이런 큰 병을 만나면 가족은 하나로 똘똘 뭉치거나 분열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해요. 아이 아버지나 어머니가 침대 곁에서 밤을 새우거나 하루종일 병원에 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아시겠죠?"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뇌 질환은 거기에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버린다. 그런데 환자의 뇌는 죽었고 몸은 따뜻하고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can't go on. I'll go on)."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되 거기에 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혹은 가능하다 해도 확실히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 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


오늘과 내일을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되자,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영어에서 우리는 시간(time)이라는 단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지금 시각(time)은 두시 사십오 분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힘든 시간(time)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요즘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처럼 느껴진다. 나는 무기력해졌고, 더 너그러워진 것 같다.


"진정한 용기를 보려는 자가 있다면 / 이리로 오게 하라 / 그러면 환상은 사라지고 / 그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여 / 순례자가 되고자 할 것이다." 죽음을 정명으로 바라보겠다는 폴의 결단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증명할 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How Long Have I Got Left?" - New York Times 읽어보기


의사 에마 헤이워드는 암에 걸린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말한다. 하나는 평소에 하던 일을 집어치우고 칭병하며 아무것도 안 하는 절망적인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오히려 그 병 때문에 더욱 평소 하는 일에 몰두하는 긍정적인 태도가 그것이다. 칼라니티는 후자의 태도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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